<99% 페미니즘 선언>, <분배냐, 인정이냐?> 등의 저서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신작 <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>이 번역 출간됐다. 책의 제목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쓴 <옥중수고>의 구절을 빌렸다.

프레이저는 미국 정치에서 트럼프가 집권할 수 있었던 배경을 면밀히 살피고, ‘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’라는 정세 인식을 토대로 미래를 전망한다. 미국 사회주의 잡지 <자코뱅(Jacobin)>의 발행인인 바스카 순카라와의 심도 있는 대담을 함께 엮어 이해에 도움을 줬다.

정치를 ‘리얼리티 쇼’의 현장으로 만들며 임기 마지막까지 논란의 중심에 있던 트럼프의 시대가 끝났다. 후임인 조 바이든 대통령은 “가장 미국다운 내각”을 표방하며 부통령으로 아시아계 흑인 여성인 카멀라 해리스를 지명하면서부터 화제를 모았다. 인수위원회 시절 하마평에 오른 인물마다 트럼프 정부와 차별됨을 강조했다. 그 면면은 굳이 전임 정부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높은 기대를 받고 있다.

그러나 프레이저는 의문을 제기한다. <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>은 바이든의 당선 이전에 출간됐지만, 프레이저는 트럼프의 퇴진이 바로 새로운 시대가 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.

프레이저 사상의 핵심은 사회의 정의(justice)를 ‘분배’와 ‘인정’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눴다. 분배는 사회의 자원과 재화를 어떻게 배분하느냐의 문제로, 정의의 사회경제적 측면을 나타낸다. 인정의 차원은 어떤 집단의 정체성과 소속이 사회에서 어떻게 인정되는가의 문제로, 정의의 문화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.

이 둘을 분리함으로써 어떤 차원에서는 진보적인 세력이 다른 차원에서는 진보적이지 않을 수 있음이 드러난다. 예컨대 모든 차별을 철폐하자는 진보적 인정 정치를 추구하는 세력이 극도로 불평등한 신자유주의적 분배 정치와 모순 없이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.

<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>은 짧은 정치 팜플렛 형식이지만, 21세기의 중요한 사상가 중 한 명인 프레이저에 대한 입문서로도 기능한다. 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프레이저의 사상에 대해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.